33

10 0 0
                                    

아주 오랫동안 공들여 모용화의 머리를 말린 후, 빗질을 시작했다. 먼저 앞머리를 빗고 뒷머리로 넘어갔을 즈음 모용화가 대뜸 물었다.
“안 거슬려?”
“뭐가요?”
모용화는 대답 대신 앞머리를 살짝 쓸어내렸다.
“왜 길렀는지 궁금하긴 해요.”
“이러면 남들이랑 눈을 덜 마주칠 수 있어서 좋아.”
“아, 확실히 그렇겠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빗질을 마저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앞머리 가지고 엄청 뭐라 하죠?”
“응.”
“그런데 도련님은 도저히 앞머리를 짧게 자를 수가 없어서, 기르시는 중이고요.”
모용화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시네요.”
“뭐가?”
“솔직히 모용가 사람 앞에서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여기 사람들 성격 장난 아니잖아요. 한번 꼬투리 잡으면 사람 피 마를 정도로 계속 잔소리할 것 같은데.”
“고작 그게 대단한 거야?”
“고작이라뇨, 엄청 대단한 거죠. 간섭 심한 사람들 앞에서 자기 스타일, 아니 머리 모양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요. 저도 남들 신경 잘 안 쓰는 편이지만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서 머리 짧게 자른 적 몇 번 있어요.”
“……그냥 다른 사람이랑 눈 마주치는 게 싫어서 그런 것뿐인데도?”
“바로 그게 대단한 거라니까요. 아, 이렇게 보니 모용화 도련님도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것도 아니네요.”
“…….”
모용화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런가?”
“당연하죠. 다음번엔 다른 것도 도전해보세요.”
“예를 들면?”
“음……. 누가 심부름시키면 바쁘다고 안 한다고 거절한다든가?”
“하인들이 쌔고 쌨는데 내게 심부름을 시킬 리가 없잖아.”
아, 또 웃었다. 모용화는 내 헛소리가 마음에 든 건지, 기분 좋은 웃음소리까지 흘렸다. 뽀송뽀송해진 상태로 웃으니까 더 귀엽다. 나는 빗질을 마치고 모용화에게 차를 따라줬다.
“다시 데워 올까요?”
“아니, 미지근한 게 좋아. 너무 뜨거우면 먹기 힘들거든.”
시, 심지어 고양이 혀……?! 흥분을 억누르기 위해 나는 식탁 밑으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예상치 못한 모에 요소……! 세상에 모용화만큼 인상이 휙휙 바뀌는 사람도 드물 거다. 처음엔 앙칼진 고양이, 다음엔 비 맞은 날에 버려진 대형견, 지금은 사람을 조금 무서워하지만 성깔 있는 아기 호랑이 같다. 근데 호랑이도 뜨거운 걸 잘 못 먹나? 같은 고양잇과니까 비슷하려나. 또 망상의 구름이 뭉게뭉게 펼쳐지던 그때, 모용화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만족스럽게 말했다.
“딱 알맞게 식었네.”
결국 일말의 이성이 붙잡아주던 정상적인 사고가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알 게 뭐야. 우리 아기 호랑이가 미지근한 게 좋다는데. 앞으론 모용화와 식사할 때마다 모든 음식을 부채로 차갑게 식혀주겠어.
“네 얼굴 보니까 갑자기 기분이 더러워지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에이,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도련님, 차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모용화는 맞은편 자리를 가리켰다.
“너도 앉아.”
“그래도 돼요?”
모용화의 맞은편에 앉아 내 몫의 차도 한 잔 따랐다. 예전의 나는 절대 예상하지 못했다. 모용화와 사이가 좋아진 거로도 모자라 마주 앉아 차까지 마시게 될 줄은. 정말 인생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거다.
“……그때 말이야.”
“네?”
나랑 있을 땐 편하다고 했으니까 얼굴 마주해도 괜찮겠지? 나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모용화를 쳐다봤다. 모용화는 정말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때 내가 억지로 끌고 가려 했던 거…….”
5년 전 그때 일을 사과하려고 하는 건가? 모용화는 소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됐어.”
그래, 사과까지는 아직 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겠지. 하지만 이미 내 안의 모용화는 아기 호랑이일 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소심하고 까칠한 사과를 받아내주겠어.
“그냥 지금 미안하다고 해주세요.”
잘못했으면 응당 사과를 해야지. 나는 모용화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저 그때 팔 진짜 아팠어요. 거기서 힘을 더 줬더라면 부러졌을 수도 있대요.”
“…….”
“전 무공도 안 익혀서 아무 힘도 없어요. 그땐 정말 모용화 도련님이 잘못한 거예요.”
“하지만 네가 그때……!”
“제 탓 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정말 슬플 것 같아요.”
모용화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확실히 모용화 도련님이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힘드신 거 알아요. 소서 도련님과 사사건건 비교당하는 후계자라서 예민하셨겠죠. 하지만 그게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진 않아요. 세상 모든 사람이 자기 기분 나쁘다고 함부로 행동했다간 진작 세상은 멸망했을 걸요?”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을 당해도 남들한테 화풀이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나는 모용화 도련님을 빤히 바라봤다. 마침내 모용화 도련님이 입을 열었다.
“미, 미…….”
그래! 할 수 있어! 나는 주먹을 꼭 쥐고 응원하는 눈빛을 보냈다.
“미친, 못해먹겠네.”
모용화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역시 오늘 사과 듣는 건 불가능한가 보다. 반쯤 체념했을 때였다.
“그래도 네 말이 옳아. 그때의 내가 정파로서, 오대세가의 일원으로서 그릇된 행동을 한 건 사실이니까.”
모용화는 고개를 숙였다.
“미안.”
세상에나! 나는 너무 기뻐 환해진 얼굴로 냉큼 입을 열었다.
“괜찮아요. 저도 그때 고집부리긴 했어요.”
모용화가 이렇게 장족의 발전을 해내다니. 묘령이 나보고 가끔 목에 칼이 들어와도 고집을 꺾지 않아서 불안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앞으론 나도 좀 더 유연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피할 수 있는 분란은 최대한 피해야지. 나는 어느덧 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제 슬슬 주무실까요?”
모용화도 피곤했는지 순순히 침상에 누웠다.
“이불도 덮어드릴게요.”
“……나도 손 있어.”
“에이, 덮어드릴게요.”
나는 모용화에게 꼼꼼히 이불을 덮어준 후 촛불을 껐다. 침상에서 멀어지려는데 옷자락이 당겨졌다. 의아한 눈으로 모용화를 쳐다봤다. 쳐다보니 그가 내 옷자락을 잡은 채 물었다.
“언제쯤 돌아갈 거야?”
“이제 가야죠.”
“……소서 형님한테?”
모용화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생각 없이 저번처럼 화낼까 봐 고개만 끄덕였는데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간다고 해도 괜찮을까? 내심 긴장한 순간 모용화가 손의 힘을 풀었다.
“……그래, 넌 누가 뭐래도 소서 형님의 하인이니까.”
우리 모용화가 달라졌어요. 감격스러움에 또 입을 틀어막을 뻔했다. 모용화는 날 등지고 누웠다.
“가봐.”
그 모습이 조금 안쓰럽지만 어쩔 수 없지. 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런데 내가 열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응? 문을 이렇게 거침없이 연다는 건……. 나는 꿀꺽 침을 삼키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모용화의 아버님이 매섭게 날 노려보고 있었다.
“어떤 쥐새끼가 감히 흙 묻은 발바닥으로 이곳을 돌아다닌다고 해서 왔더니.”
“……아, 안녕하세요?”
“그게 네놈이었구나? 팽소서에게나 붙어 있을 것이지, 왜 너 따위가 여기 있는 것이냐?”
“아버지!”
당장 내 머리채를 휘어잡으려던 아버님이 멈칫하셨다. 모용화가 몸을 일으키면서 공손하게 말했다.
“……제가 데려왔습니다.”
“네가 데려왔다고?”
아버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데려온 거지?”
모용화는 애꿎은 이불을 꽉 쥐며 입을 움직였다.
“입담이 좋다고 해서…… 호기심에 한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이 아비와 대화하는 것도 싫어하면서 다른 집 하인과 뭔 얘기를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내 아들이라 널 최대한 이해하고 감싸주려 했거늘……!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해? 이제 나도 도저히 못 참겠다!”
……그렇게 많이 참은 건 아닌 것 같은데? 만난 지 얼마 안 된 나도 간파할 수 있는 거짓말을 어디서.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도대체 날 얼마나 실망시킬 셈이냐! 당장 내일 그 팽소서와 싸울 수도 있는데 이딴 헛짓거리나 하고 있어? 다른 집안 하인 끌어들일 시간에 검이라도 한 번 더 휘두를 것이지!”
“…….”
어, 어떡해. 우리 모용화 다시 기죽게 생겼다. 기껏 내가 기 열심히 살려놓았는데……! 하지만 여기서 함부로 끼어들었다간 아버님의 불타오르는 화에 기름만 붓는 꼴일 것이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이 상황을 해결해줄 구원자가……!
“밖이 왜 이리 소란스러운 것이냐! 모용화가 또 집안 망신이라도 시켰느냐?”
“…….”
전 구원자를 불렀지, 여기서 더 상황 악화시킬 사람 부른 게 아닌데요. 반품 안 될까요. 나는 텅 비어버린 동공으로 어느 나라의 황족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위엄 있게 생긴 할아버지를 멍하니 쳐다봤다. 저분이 바로 소서와 모용화의 할아버지인 모용가의 가주가 분명했다.
“별일 아닙니다. 아버님. 제가 잘 타이를 테니.”
“아니, 머리를 아직도 안 자른 게야?!”
……정말 사람 미치기 딱 좋은 상황이다. 모용화는 고개를 숙이고 몸을 웅크렸다.
“내가 오늘은 참아주겠지만 두 번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머리가 아직도 그 꼴이야! 당장 검을 가져오너라! 내 손으로 직접 잘라버려야……! 응? 네놈은 또 누구냐?”
할아버지가 드디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날 발견했다. 다행이다! 최대한 내 쪽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저놈은 누구냐? 못 보던 놈인데, 새로 들인 하인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팽소서의 하인입니다.”
“뭐? 팽소서의?”
나는 당장 납작 엎드려 절을 했다.
“팽가에서 일하는 하묘하라고 합니다.”
“아, 네가 바로 소서가 아낀다는 하인이군. 일어나봐라.”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는 내 얼굴을 감상하다가 한마디 툭 던지셨다.
“생겨먹은 것이, 꼭 남의 곳간 털어먹고 볼이 빵빵해진 쥐새끼 같군.”
“그렇죠?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
이상하다. 햄스터도 일단 쥐니까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왜 기분이 나쁘지?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지? 화의 옆이 아니라 소서의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저, 그게…….”
“혹시 소서가 시킨 것이냐? 화를 돌보라고?”
진짜 절대 아닌데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제멋대로 결론 내렸다.
“그놈은 그릇이 참 크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놈이 모용가에 태어났어야 했어.”
“……아버지, 제발 그만하세요. 그래봤자 그 녀석은 팽가를 이을 아이입니다.”
“너도 잘한 거 하나 없으니까 입 다물어라. 그 아들에 그 아비란 말도 모르겠느냐? 화가 저렇게 된 건 네 책임도 있다.”
그만, 제발 그만. 우리 아기 호랑이 가슴에 비수 좀 그만 꽂아, 이 나쁜 놈들아.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까 우리 아기 호랑이 좀 살려줘. 애꿎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을 때였다.
“가주님, 대화 중에 실례합니다.”
“뭐냐?”
“지금 바로 밖에 나가보셔야겠습니다……!”
모용화를 구해줄 진정한 구원자가 등판했다.

무협을 모릅니다  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