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One summer n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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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마법사란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인 줄 알았지.

드센 햇볕이 거리를 옥죄었다. 그나마 그 숨막힘을 피할 만한 장소는 테라스 그늘 아래뿐이었다. 더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자 나뭇가지로 듬성듬성 만든 테라스의 지붕 아래로 햇살이 쏟아졌다. 클로이가 눈살을 한 번 찌푸리며 맞은편의 동급생을 바라보았다. 이 뙤약볕에도 그녀는 흐트러짐 한 번 없이 가만히, 책 위에 눈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대화 유도를 위해 던진 말이었는데, 노력이 무색할 정도로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았다. 한참 반응을 기다렸음에도 묵묵부답이 이어지자 기다리다 못한 클로이가 홀로 말을 이어갔다.

"왜, 동화책에서도 항상 공주님의 소원을 들어주는 건 노력이나 근성이 아니라 갑자기 튀어나온 마법사의 재능 기부잖아. 그래서 마법을 배우는 건, 노력에 비해 제법 큰 소원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인 줄 알았어."

남들이 들으면 공감 내지는 유치하다는 웃음정도는 살 수 있을 법한 이야기인데도 동급생의 그녀의 주변에선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클로이는 자신의 친구가 혹시 귀머거리가 된 건 아닐까 고민할 정도였다. 그래, 항상 난 떠들고 넌 무시하고 그랬었지. 클로이가 단념하고 책으로 다시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에 동급생의, 그녀의 보라색 단발머리가 미동을 보였다.

  "사실 마녀는 말야."
  "... ..."
  "마냥 공주가 행복해지길 바랐던 건 아닐 지도."

  시련과 고난에 대해 해결하려는 노력보단 발만 동동 굴릴 줄 아는 그녀가, 한순간에 행복해지길 바라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설령 그렇게 됐다고 한들, 그런 소 발에 쥐 잡기식의 '행운'이 '행복'의 가치를 띌 수 있을까?

  그녀가 씩 웃었다. 클로이도 따라 웃었다. 그럼 넌? 공주님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마법을 써줄 거야? 동급생의 질문에 클로이가 잠시 고민하는 듯 했다가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 요령 부릴 줄만 아는 머저리는 행복할 가치가 없다고 딱 잘라 말하겠지. 그리고 차라리 왕자에게 난 어떻냐고 어필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어쩌면 시시한 인간 여자보다는 마법사 쪽에 흥미가... ... 그 때 동급생이 그녀의 말을 딱 잘랐다.
  "자, 노력 없는 행복은 가당치도 않다는 네 의견 잘 들었어. 그럼 이행해야지. 다음 주가 시험이야."
  "아아... ... 넌 역시 재미 없어."

* * *

  인적 드문 숲의 주인은 당연한 얘기지만 자연의 구성원들이었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풀은 제멋대로 길게 뻗어있었고, 온갖 동물들이 그 위를 뛰어다녔다. 워낙 울창한 나무들이 많아 햇빛마저 잘 보이지 않을 정도의 숲은 너무 깊어 음침한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살, 살려 줘... ..."
  목으로 역류하는 고통에 흐느끼는 신음을 내뱉던 남자가 그 날카로운 풀 위로 쓰러졌다. 적녹색으로 물든 풀밭 위 시체 옆에는, 여우 한 마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죽인다고 하지 않았어요. 같이 살자고 했잖아요."
  "컥, 크헉... ..."
  "언제나 함께하는 거예요."
  반쯤 죽어버린 남자에게 입을 맞춘 여우는 신기한 빛을 내며 사람의 형체가 되었다. 은빛 꼬리만 아니라면 그녀는 영락없는 인간 여성이었다. 그녀는 이내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시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기이한 행동은 길지 않았다. 이내 입가에 피를 잔뜩 묻힌 그녀가, -아니 그 여우는-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언제나 함께하는 거예요. 내 속에서, 영원히."

  사냥을 마친 여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 짐승의 모습으로 돌아와 무리에 섞였다. 무리의 누구도 그녀의 비밀스러운 식사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어떤 여우도 그녀와 같은 행동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밀은 오래 지켜지지 않았다.
  달빛이 흐드러진 여름밤이었다.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낀 그녀는 무리에서 살짝 벗어나 강 쪽으로 걸었다. 예민한 감각을 자랑하는 여우들의 습성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밤에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기습에 익숙한 대자연의 약육강식에 따라 그 누구도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고, 그건 여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매일이 전투같은 '숲'에서 살아남은 종족 중에 여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지 확인한 뒤, 스스로 자신의 팔을 깨물었다. 옅은 피가 흘렀다. 그러자 기이한 빛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녀의 몸을 감싸던 짐승의 털은 사라지고 두 팔과 다리가 매끈하게 뻗어났다. 두 눈에는 여전히 여우의 기운이 느껴졌지만 옅게 열린 입술에는 교태가 넘쳤다. 봉긋한 양 가슴이 솟아오르고 그 위로 남색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두 팔로 기지개를 켰고, 두 다리로 숲을 걸었다. 달빛이 내린 강물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인간들은 이걸 목욕이라고 한댔지. 여름밤은 깊어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 달빛 아래 그림자 사이에 숨은 이의 눈은 매섭기만 했다.

  "처형이다! 네 놈은 종족의 배신자야!"
  깊은 상처를 입은 여우는 동족의 거친 말 사이에서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일어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간밤의 강가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 그녀의 모든 것이 들통난 채 아침을 맞이했던 것이다. 여우의 몸에 아직 혈흔이 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위태로운 것은 분명했다.
  "끝까지 말을 않겠다는 것이냐?"
  "... ..."
  "죽음이 아니고서는, 네 죗값을 치룰 방도가 없구나."
  늙은 여우가 몸을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날카로운 이를 가진 여우가 씩 웃으며 발을 굴렀다. 여우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배신자의 처형에 뜨거운 열광이 쏟아졌다. 그 끔찍한 광경의 직전에 몇몇 어린 여우들이 시선을 피하기도 전에 늑대처럼, 튀어오른 여우가 그녀를 거세게 물었다. 그러나 그 강한 일격에 튕겨져 나온 것은 그녀가 아니었다

  여우는 무작정 도망쳤다. 인간의 몸으로 무리의 날쌘 방해공작을 벗어날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다행이도 기우였다. 그녀의 발놀림에는 여전히 여우의 민첩성이 남아있었다. 익숙한 산의 공기, 바람의 목소리. 그러나 그녀는 더 이상 '여우'라는 산짐승의 둘레에 속할 수 없는 몸이었다. 탐욕이 있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인가, 살아있기에 탐욕이 끊이지 않는 것인가.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쯤에서야 모든 여우들을 따돌린 듯했다. 숨을 고르자 다리의 힘이 풀리며 주저앉았다. 그렇게 힘차게 뛰었지만 산의 조금도 벗어나지 못했음이 슬프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탄할 틈이 없었다.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이 숲에서 그녀의 존재를 지워야만 했다.

  여름이 짙어가고 있었다.

<1. One summer night> fin.
league of legends fan fiction
Title. 우리가 계절이라면
Written by own 2017-01-31 ~

우리가 계절이라면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