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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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뭐지?’

레일라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창틀 사이로 디밀어진 봉투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레일라 싱클레어 양에게.

누가 보낸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수신자가 자신인 것은 확실했다.

레일라는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들어 있던 편지를 펼쳤다.

-친애하는 레일라 양.

……오늘 건국제에서 킬리언 루드윅을 바라보던 레일라 양이 상당히 당황스러워 보이더군요.

사실은 저 역시 에디트 리겔호프의 뻔뻔한 작태를 보며 어이가 없음을 넘어 분노를 느꼈습니다.

킬리언이 그런 불여우의 계략에 넘어가도록 그냥 놔둬야겠습니까?

제게 에디트 리겔호프를 없앨 아주 좋은 계획이 있으나 저 혼자는 실행이 어렵습니다.

만약 레일라 양 역시 그 여자에게 분노를 느끼고 계시다면, 내일 아래의 주소로 나와주십시오.

의례적인 인사를 다 건너뛰고 읽은 편지에는 함께 에디트를 없애자는 제안이 정중한 어투로 쓰여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편지를 보낸 상대를 먼저 의심했겠지만, 온종일 에디트에 대한 분노로 활활 타올랐던 레일라는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역시, 나만 그 여자가 꼴 보기 싫은 게 아니었어!’

자신의 분노가 정당하다고 인정받은 느낌이었다.

레일라는 그제야 진정하고 잠을 청할 수 있었다.

다음 날, 레일라는 하녀 한 명과 기사 한 명을 대동한 채 편지에 쓰인 주소지로 찾아갔다.

그곳은 르벨마리 거리의 양쪽으로 뻗은 수많은 골목 중 하나였다.

“여긴가?”

레일라는 편지의 주소와 건물에 붙은 번지수를 대조해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리고 그녀가 노크하기도 전에 문이 삐걱거리며 열렸다.

“들어오시죠, 싱클레어 영애.”

무표정한 얼굴의 기사였다.

레일라를 호위하던 싱클레어가의 기사가 검 손잡이를 잡으며 긴장했지만, 건물 안에서 나온 기사는 굉장히 정중했다.

레일라는 손을 들어 제 호위 기사를 진정시키고 주위를 살피다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은 밖에서도 음침해 보이더니 안쪽도 어두컴컴했다.

“왜 이렇게 어두워?”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건물 안은 부유한 평민이 살 법한 주택처럼 꾸며져 있었다.

다만, 먼지 없이 깨끗하게 청소된 상태와는 달리 이 주택에는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은밀한 만남이다 보니 싱클레어 영애와 어울리지 않는 곳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전히 깍듯한 기사의 태도에 레일라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기사는 건물의 2층으로 레일라를 안내했고, 그가 문을 열어준 2층의 응접실에는 침착해 보이는 20대 중반의 여자가 레일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싱클레어 영애.”

상대의 계급이나 지위를 알지 못했던 터라 레일라는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그녀가 권하는 대로 소파에 앉았다.

“나한테 편지를 보낸 사람의 정체를 먼저 밝혔으면 하는데.”

레일라가 턱을 치켜들며 말하자 맞은편의 여자가 옅게 미소 지었다.

“누구라고 자세히 말씀은 드릴 수 없습니다만…… 이 정도면 짐작하실 수 있으실 테지요.”

여자는 겉에 입고 있던 코트를 살짝 걷어 자신의 왼쪽 가슴 위에 달린 작은 배지를 보여주었다.

그건 루드윅 가문의 사용인들이 달고 다니는 배지였다.

“그럼…… 자네나 저 기사 모두, 루드윅가의 사람이라는 거야?”

18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