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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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자책하지 말아요, 킬리언.”

“이건 제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할 죄책감일 겁니다.”

“아니, 정말 자책하지 않아도 되는데…….”

그는 그냥 이 소설의 캐릭터였을 뿐이고, 그래서 원작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을 뿐이다.

이제야 이 모든 게 보이는 건 내가 3단계 예외 조건을 충족시켜서 원작의 흐름이 극도로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고.

킬리언뿐만 아니라 아마 클리프나 공작 부부 역시 이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이제부터는 원작의 흐름이 아닌 개연성이 이 세계를 지탱하는 주된 힘이 된다고 그랬지?’

원작의 인과 관계가 다 사라져 버렸다고 해서 내가 갑자기 이 세상의 주인공이 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원작을 다 읽고 온 나라고 해도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는 거다.

그러나 나는 두렵지 않았다.

‘반대로 말하면, 이제 드디어 내가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거잖아!’

나로서는 지금부터가 메인 스토리의 시작이라 이거야!

그러나 그 전에, 그동안 킬리언에게 말하지 못했던 것을 다 고백해야 했다.

더 이상 그에게 숨기는 것 없이 나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온전한 나로서 그에게 이해받고, 또 사랑받고 싶었다.

“좀 늦었지만, 나도 당신한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나는 그의 손에 잡힌 손을 빼내어 그의 손등 위에 포갰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미 대충 눈치챘는지도 모르겠지만, 나, 그러니까 에디트 리겔호프는…….”

“당신은 에디트 루드윅입니다.”

어우, 정색하는 거 봐라. 한 대 치겠다?

“그래요, 어쨌든 나는, 리겔호프가에서 어릴 때부터 학대받으며 자랐어요. 내가 파티에 나가 벌인 모든 욕 먹을 행위들은 전부 내 아버지라는 작자가 강제로 시킨 짓들이었죠.”

“왜 미리 말하지 않았습니까?”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첫 번째로는, 내 진실을 알고도 당신과 루드윅 가문이 나를 받아들여 줄지 확신할 수 없었어요. 나는 리겔호프가의 충성을 위한 인질이었는데, 내가 그 기능을 못 하는 빈 쭉정이라는 걸 알면…….”

“에디트…….”

킬리언은 침통해 보였다. 내 말에 반박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것은 두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나는 이 순간까지 내 진실을 밝혀도 되는지, 밝힌다면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킬리언.”

말하다 말고 갑자기 저를 부르는 게 의아했는지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혹시, 초자연적인 현상을 믿어요?”

“갑자기 그건 왜 묻습니까?”

“그게 내가 당신에게 나에 대한 것을 전부 밝히지 못한 두 번째 이유이기 때문이에요.”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해주십시오.”

나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에디트의 모든 기억을 갖고 있어요. 그리고 동시에…… 최수나라는 인간의 기억도 갖고 있어요.”

“체스나?”

나는 그의 발음에 잠깐 웃었다.

“아뇨. 최, 수, 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살던, 28세의 여자였죠. 부모님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고, 나는 수도에서 일하면서 돈을 벌었지만 개망나니 같은 오빠가 자꾸 돈을 빼앗아가서 모이는 돈도 없고, 거기다 어릴 때 큰 병을 앓아서 건강하지도 못한…… 막막한 인생이었어요. 그래도 남들만큼은 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꽤 아등바등했죠.”

18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